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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요즘 수학의 즐거움 채널에서 조금 찐하게 수학을 공부 중이다. 채널 활동 중에서도 받는 질문이자 개인적으로도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나는 수학을 왜 공부하는가. 그 전에 어릴 때 얘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1. 나는 국민학교를 입학하여 국민학교를 졸업한 세대이다. 4학년 때 선생님의 권유로 산수경시를 시작했다. 상도 많이 받았다. 중학교 때까지 도 내에서는 거의 항상 1등을 했던 것 같다. 전국대회 상도 받았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전국대회에서의 7등이 개인적으로 가장 높은 순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경시대회 성적이 꺾이기 시작했다.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큰 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사춘기에 맞이한 존재론적 고민 때문인지, 수학의 정석에 맛을 들여서인지, 아니면 그냥 내 실력이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수능 수학은 거의 만점을 받았다.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어렵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경시대회나 올림피아드 문제를 받아보면 아예 손을 대지 못했다. 분명 내 뒤에서 출발했던 친구가 어느새 나보다 올림피아드 문제를 더 잘 풀게 됐을 때 느낀 좌절감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당연히 수학자가 되리라 생각한 나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3. 대학교에 들어가 학부 1학년을 마친 후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여전히 수학은 좋아했다. 미적분학 성적도 좋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미래의 직업은 다른 문제라고 여겼다. “수학 전공하면 취업이 안된다”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게다가 이미 나의 수학실력에 대한 믿음은 무너져 있었다. 결국 ‘가장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매력에 끌려 기계공학을 선택했다.
4.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반반이라고 대답하겠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덕분에 여러 도메인에서의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분명히 취업에도 도움이 되었으니까.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미적분학 성적이 좀 좋았다고 해서 수학에 자질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미련은 많이 남는다. 적어도 맛이라도 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수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그때의 미련을 없애기 위해서일 것이다.
5. 나는 수학을 왜 공부하는가. 첫 번째는 순수하게 수학이 좋아서이다. 수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수학과 수학자에 대한 동경은 한 번도 식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 살짝 맛보았던 전공수학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는 것으로 보였다. 호기심이 많이 생겼다. 어릴 때 읽었던 수학 역사의 책들, 특히 19세기말-20세기 초 칸토어에서 힐베르트를 거쳐 괴델과 튜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매료된 것도 수학을 향한 마음에 불을 지폈으리라. 하지만 혼자 공부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모르는 내용이 나와도 편하게 물어볼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 요즘은 수학의 즐거움에서 이 부분을 해소하는 중이다.
6. 두 번째는 실질적으로 내 포지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하고 연구하고 논문 쓰는 사람이다.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왠지 나는 실험보다는 이론이 더 좋았다. 현재 여건 상 실험논문을 쓰기 어려운 점도 있다. (내가 과제 제안서 쓰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지만…) 하지만 잘 둘러보면 이론만으로도 논문 거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좋은’ 논문이 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어떻게든 논문거리는 될 것 같은 주제들은 찾을 수 있다. 항상 무언가 근본을 건드리는 주제를 찾고 싶었다. 이 작업에는 수학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7. 세 번째는 수학 책을 쓰고 싶어서이다. 수학 전공자가 아니니 전공서적은 쓰지 못하겠지만, 비전공자를 위한 전공수학 맛보기 정도는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요즘 간간이 올리는 수학공부 자료들도 전부 집필을 위한 밑작업이다. 책을 쓴다면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비전공자 출신이 많은 학교 특성 상, 전공수업을 따라오기 힘든 첫 번째 이유는 수학이다. 이 허들을 넘게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 좀 더 거창하게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수학에 대한 혐오감을 없애고 싶다. 입시를 위한, 정답만을 빠르게 찾는, 점수를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수학이 아니라, 수학만이 갖고 있는 순수한 학문적 즐거움을 모두에게 전파하고 싶다. 솔직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내 이름을 걸고 책을 쓰고 싶다. 참고로 수학 말고도 쓰고 싶은 책은 많다. 아직 쓴 게 하나도 없어서 문제지만.
8. 불확실성이 가득한 시대에 수학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사회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과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활동을 대체하게 되면, 도구를 잘 사용하는 것에 우리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조차 인공지능이 알려준다면, 우리 각자는 어떻게 스스로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각자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자기만의 도구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감히 여기에 수학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9. 수학 공부는 쉽지 않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학만큼 비전공자와 전공자의 괴리감이 큰 분야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야는 적어도 인간의 언어로 써있기라도 하지, 수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호가 난무한다. 용기내어 수학 공부를 시작하려 해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정하기 어렵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바닥부터 차근차근 밟아 나가려고 한다. 지겨워진다. 결국 의미를 잃고 동기가 없어져 흐지부지된다. 이 꼴이 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0. 대화를 하면 된다. 공부에 있어서 대화가 통하는 동료는 중요하다. 수학이라고 다를까. 수학은 역사적으로 대화를 통해 꽃을 피웠다. 수학자들은 서신과 논문과 학회를 통해 대화했다. 혼자일 때보다 같이 할 때 빛났다. 하디는 곁에 리틀우드와 라마누잔을 두고 있었으며, 에어디쉬는 집도 없이 여행 가방 하나 들고 동료 수학자들의 집을 들락날락하며 1500여 편의 논문을 작성했다. 핼리가 뉴턴을 집요하게 설득하지 않았다면 프린키피아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온고지신이라고 했던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수학이 어렵다면? 알려줄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자. 혼자 공부한 것을 공개해보기도 하자. 일단 뭐라도 시작하자.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준비가 안 된 건 지금이나 나중이나 똑같다. 나중이라고 준비가 될 것 같은가. 수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우선 잘 발달된 커뮤니티에 들어가자. 그리고 물어보자. 나 이거 모르겠다고. 알고 싶다고.
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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