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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인셉션에는 멋있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영화 극초반에 나온 다음 대사이다.
코브: 가장 끈질긴 기생충은 뭘까요? 박테리아? 바이러스?
아서: 코브씨가 말하려는 것은-
코브: 생각(idea)입니다.
1. "수학 공부"에 대해 흔히들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수능 문제 잘 풀고, 중고등학생 과외를 기깔나게 해줄 수 있고, 수학적으로 신기한 거 많이 알고 있는 것. 어떤 면에서는 전공 수학과 대중과의 괴리에서 기인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제도권 수학과 전공 수학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제도권 수학은 순수히 "기술"을 가르치는 수학이다. 문제를 빠른 시간에 정확하게 풀고 정확한 답을 도출하는 기술. 나는 이것을 "매뉴얼식 공부"라고 부른다. 세탁기 매뉴얼을 보고 세탁기를 사용하듯, 수학 문제 풀이 매뉴얼을 익혀서 수학 문제를 푼다. 이것이 수학을 잘 하는 것이라는 생각(idea)에 갇혀있는 경우를 주위에서 종종 본다.
2. 문제 풀이? 요즘은 기계가 더 잘한다. 굳이 ChatGPT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Integral Calculator 사이트에 가서 복잡한 적분 문제를 풀게 시켜보자.
3. 전공 수학을 처음 접하면 다들 당황한다. 집합론에 왜 공리가 필요한지, 자연수를 왜 1, 2, 3, ...이라고 쓰면 안되는지, 중간값 정리가 왜 자명하지 않은지... 이런 "당연한" 것들이 당연할 이유가 없음을 듣다 보면 어질어질해진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귀류법과 배중률의 부정이었다. 어떤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함은 너무 자명한데, 이것조차 부정하는 수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4. 전공 수학도 "매뉴얼식"으로 공부하려면 할 수 있다. 우스개 소리로
암기가 싫어서 수학과에 왔는데,
시험 준비를 하다보니 수학도 암기과목이더라.
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해서 남는게 뭐가 있냐고 물으면 여전히 문제 풀이 기술밖에 없다. 이해 없이 외우기 때문이다.
5. 내가 수학의 즐거움에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습관이 하나 있다. 어떤 개념, 정의, 정리, 증명을 한줄한줄 납득이 될 때까지 쭉 읽는다. 그 다음엔 그걸 안 보고 종이에 써본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막히는 부분이 생기는데, 왜 막히는지 확인하고 내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논리를 만든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며 적는다. 이건 외워서 될 일이 아니다. 자기만의 언어로 재구성을 해야 한다. 이렇게 공부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잘 까먹지 않게 된다.
6. 당연한 얘기지만 이게 한번에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간이 걸린다. 가끔은 산책이 도움이 된다. 아무 장애물이 없는 곳을 - 예를 들면 운동장 -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논리가 만들어질 때가 있다. 내가 최근에 쓴 글도 산책 중에 구상한 것이었다. 수학에서 중요한 것이 deep thinking과 keep thinking이라고 한다. 나는 deep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keep thinking만이라도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7. 제도권 수학은 대략 18세기까지의 수학이다. 뉴턴, 오일러, 가우스 등의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리만, 칸토어, 그로센딕이라는 이름은 못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세기 이후의 수학자들이며 현대 수학의 근간을 만들었다. 전공 수학은 이들의 수학을 배우는 것이다. 제도권 수학과의 괴리는 시대의 차이에서 오기도 한다.
8. 수학을 공부해보면 19세기 이후의 수학이 훨씬 재밌다. 제도권 수학을 공부하고 문제를 풀다보면 "오케이, 풀렸어. 그런데 이제 뭐하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전공 수학은 파면 팔수록 궁금한 것이 더 생긴다. 문제를 푸는 것보다 훨씬 재밌다. 나는 이 맛에 수학 공부를 한다.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이 생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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