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 책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길을 잃은 채 여행하기
여행에서 길을 잃었음은 많은 경우 혼란과 고난의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길잃음은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을 뜻합니다. 책 전반에 걸쳐 그 느낌이 유지되며, 동심을 잃지 않은 채 나이든 아이의 모습을 저자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러웠습니다.
책은 개정판이 있는 듯 한데 제가 가진 것은 구판인 것 같네요. 익살스러운 삽화가 많이 들어있고, 저자가 직접 그렸는지 좀 궁금했습니다. (저는 저자가 직접 그렸다에 한표) 개정판은 삽화가 없다고 하네요. 좀 아쉬웠습니다.
책은 400 페이지인데 - 약 400 페이지가 아니라 정확히 400 페이지 - 1부 색맹의 섬, 2부 소철 섬, 주석이 분량을 사이좋게 1/3씩 나눠갖고 있습니다. 올리버 색스의 책은 처음 읽어본 것인데, 그의 유머러스함이 느껴지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미크로네시아에 스팸을 공급하며 그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인을 "스팸 남작"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엄청 킥킥대며 읽었네요.
1부 색맹의 섬은 핀지랩과 폰페이 섬의 이야기이며, 그곳은 유전적 영향으로 마을 주민의 1/12이 색맹입니다. 여기엔 사실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데, 태풍으로 인해 섬이 완전히 초토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1775년 핀지랩 일대를 덮친 렝키에키 태풍으로 인해 섬 인구의 90퍼센트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식물군 전체가 파괴되어 생존자도 대부분 기근에 시달리다 죽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후 생존자는 20명 남짓이었고 불가피한 근친교배로 인해 색맹이라는 유전적 특징이 생겨버렸습니다.유전"병"이라고 부르지 않고 유전적 "특징"이라고 표현한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핀지랩 주민에게는 이것이 병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근시, 원시, 난시를 병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풍토적 특징인 색맹을 핀지랩 주민들은 크게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색맹이 아닌 사람들도 색맹인 가족, 친구를 다르게 대하지 않습니다. 매우 자연스럽게 섞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러지 못한 우리가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1장은 명확하게 여행일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각 절마다 내용이 휙휙 바뀝니다. 색맹인 아이들을 검사하는 내용이 나오다가, 갑자기 색맹은 어떤 느낌일까에 대한 단상이 나왔다가, 또 갑자기 잠들기 어려웠던 밤을 묘사하는 식입니다. 이런 형식의 글을 본 적이 없어서인지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다 저자의 필력 덕분이겠죠?
색맹의 섬이라니? 색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다! 뭔가 신기한 경험을 선사할 것 같아!
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자 본인도 색맹이 아니므로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무지함을 여과없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길을 잃은 여행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폰페이의 경우 난마돌이 언급되는데, 글과 사진만으로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튜브를 찾아보니 아래의 영상이 있네요.
2부의 제목은 "소철 섬"으로 괌과 로타섬에 대한 이야기인데, 로타섬은 후반부 20페이지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2015년에 괌에 갔다온 적이 있는데, 내가 머물렀던 곳이 이랬었다고? 놀라면서 읽었습니다. 아마 제가 있었던 곳은 관광지로 개발된 지역이기 때문이겠죠?
괌에도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마젤란이 왔다 간 뒤로 한 세기 반 동안 가끔씩 외부인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1668년 에스파냐 선교사들이 기독교 전파를 위한 혼신의 노력으로 이곳에 들어온 뒤였다. 이 다짜고짜 강요된 세례에 대한 저항은 야만적인 보복을 낳아 단 한 사람의 행동으로 마을 전체가 응징당하곤 했고, 이는 무시무시한 인종학살로 발전했다.
설상가상으로 식민지 이주자들을 통해서 전염병이 연쇄적으로 터졌다. 특히 천연두, 홍역, 결핵이 극심했고 거기에 서서히 타오르는 특별 선물 한센병도 있었다. 사실상의 인종학살과 전염병에다가 강제 식민지와 강제 기독교 개종-실질적으로 집단 전체의 영혼 살해 기도-은 도덕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색맹의 섬,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알마, 2015.
이스터 섬의 문명도 비슷한 방식으로 붕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도새가 멸종한 이유도 찾아보면 참 안타깝고 어이가 없는데, 지금이라도 인본주의 덕분에 더 나은 세상이 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소철 섬의 풍토병은 리티코-보딕이라고 불리는데, 리티코는 루게릭 병이라고도 불리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과 비슷하며 보딕은 치매와 비슷합니다. 문제는 환자들의 징후가 너무 제각각인 것입니다. 천천히 타는 도화선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수십 년 전의 원인이 이제와서 발병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나이, 진행속도, 증상 등 일관된 것이 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그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을 세세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2부는 여행일지와 연구일지가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리티코-보딕의 그나마 유력한 원인은 차모로 족이 먹는 음식 파당의 원재료인 소철 열매의 씨인데, 이 가설도 중간에 한번 무너졌다가 부활했습니다. 결국 색스는 몇 가지 가설 - 유전자, 소철, 광물질, 바이러스 - 만 후보로 남긴 채 책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찾아본 기사에 의하면 소철 가설이 좀 더 힘을 얻는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저자의 표현력을 잘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구문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에덴동산, 상상 속의 어린 시절은 무의식의 속임수에 의해 머나먼 과거의 에덴동산, 온갖 변화와 동요는 삭제하고 편집하여 오로지 좋은 것만 남겨놓은 어떤 마법 같은 '옛날'이 되어버렸다. 이런 꿈은 꼭 그림처럼 정적인 구석이 있어 기껏해야 미풍에 나뭇잎이 살랑거리거나 잔물결이 일 뿐이다. 이런 그림은 진화도 변화도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호박 속에 화석처럼 갇혀 있다. 내가 이런 장면 어딘가에 등장한 적은 없고 다만 디오라마를 구경하듯이 쳐다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나무를 만져보고 그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들어가는 것을 허락치 않았으며, 지나간 시간처럼 닫혀 있을 뿐이다.
색맹의 섬,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알마, 2015.
'읽는 인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전공자를 위한 이해할 수 있는 IT 지식' 짧은 리뷰 (0) | 2022.10.19 |
---|---|
[독후감] 시인 동주 (0) | 2022.09.22 |
인생의 의미가 희미해질 때 보면 좋은 영상 (4) | 2022.08.29 |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 - 레퍼런스 목록 (4) | 2022.06.02 |
화날 땐 욕 좀 해도 됩니다. (0) | 2020.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