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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수포자였는데 수학을 좀 공부하려는데요.
기초가 아주 없는데 중학교 수학부터 보면 될까요?
꽤 자주 듣는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그렇게 말한 사람 중에 수학 공부 진짜로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못봤다. 그나마 비슷했던 사례가 딱 하나 있긴 하다. 고등학교 때 수포자였다가 친구가 멱살잡고 중학교 수학부터 가르쳐서 수직상승한 지인의 경우, 그 외에는 단 한 명도 없다.
기초가 약하니까 중학교 수학부터? 안 될 수밖에 없다.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첫째, 그런 방식으로는 꾸준히 할 수 없다.
공부가 본업인 고등학생이나 교수라면 모를까(초중학생의 본업은 노는 거지 공부가 아니다), 직장인이 일 마치고 집에 와서 수학 공부를 한다? 지속 불가능하다. 지겹기 때문이다. 왜 지겨울까? 재미도 없고 목표도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도 없는데, 공부하다가 어려운 게 나오면 쪽팔리니까 어디 물어보지도 못하겠고, 그게 쌓이고 쌓여서 "역시 난 안돼"라며 결국 수포자로 되돌아간다.
목표가 있다고 해도 쉽지 않다. 갑자기 머신러닝을 현업에서 써야 한다면 무엇부터 공부해야 할까? 미적분학? 그런데 나는 기초가 없으니까 중학교 수학부터? 3년 걸려서 드디어 머신러닝을 알게 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이제 다들 딥러닝만 한다. 이제 뭘 공부해야 할까? 확률론? 선형대수학? 이런 방식으로 10년 걸리면 다행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지금보다 10년 전에 머신러닝, 딥러닝을 누가 신경이라도 쓰고 있었는지.
둘째, 중고등학교 수학은 당신이 원하는 그것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수학에서는 간단한 개념을 알려준 후, 그 개념을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배운다. 즉, 문제풀이 기술을 배운다. 참 지겹게도 문제를 푼다. 중고등학교 문제를 잘 푸는게 당신이 원하는 수학공부가 맞는가? 물론 개념 확인을 위해 어느 정도는 문제를 풀어봐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즘은 수능 수학 범위가 줄어들어서 정작 중요한 내용은 나오지도 않는다. 문제만 기괴해졌다.
중고등학교 수학 내용은 어려울 것이 별로 없다. 문제가 어렵지 개념이 어려운 게 아니다. 책을 열심히 봤는데도 개념 이해를 못한다면 둘 중 하나다. 생각없이 책을 '읽기만' 했거나, 책이 별로이거나. 수포자가 되는 것은 당신이 바보여서가 아니다. 공부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수학 문제집만 열심히 풀다보면, 중고등학교 수학 문제만 잘 푸는 기계가 될 뿐이다. 자각 없는 수행은 당신보다 인공지능이 더 잘한다.
셋째,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차근차근 순서대로 쌓으려는 고집 때문이다.
"중학교 수학부터 보겠다"는 문장 하나가 많은 것을 말해주는데, 그 중 하나가 아직도 수험생으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념, 정리, 공식을 달달 외운다고 수학을 잘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당연하게" 느껴져야 한다. 머리 속에 생각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문제 틀려도 된다. 공식 못 외워도 된다. 무언가를 정말로 이해했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을 넘어서면, 공식을 보면 "음, 당연히 그렇겠지"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것은 책을 많이 본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문제를 많이 풀어본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수학적 개념을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 잘근잘근 씹어먹어야 생긴다. 치열하게 "생각"해야 한다. 수학은 생각의 학문이다. 텍스트나 수식은 개념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마저도 사람마다 다르고 매체마다 다르다. 책과 동영상이 다르고, 저자와 강사가 다르다.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의미를, 개념의 구체화를, 이미지를 찾아라. 수학 개념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봐야 그 형태를 서서히 갖추게 된다. 과감히 주제와 개념 사이를 건너뛰어라. 중간에 조금 놓쳐도 괜찮다.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 익숙해지면 그때 다시 보면 된다.
중학교 수학부터 해서는 답이 없다면, 그렇다면 뭘 해야 할까?
하나, 당장 필요한 것부터 봐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중학교 수학 수준의 기초가 아니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무언가이다. 의미있는 결과물이 나와야 그것으로부터 다시 추진력을 받을 수 있다. 머신러닝, 딥러닝, 통계의 "수학"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수식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설명 가능하다. 바텀-업이 아니라 탑-다운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목표는 수학자가 아니다. 수학을 도구로써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당장 필요한 내용부터 파악하되, 그것의 필요조건을 찾아가라. 그것만 해도 결코 짧은 시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수험생이 아니고 사회는 학교가 아니다. 탑-다운으로 내려가다보면 중학교 수학까지 갈 수도 있다. 거기까지 가지 마라. 직관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하라. 그 과정에서 개념 자체가 이해가 안되거나 직관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을 것이다. 그 부분만 조금 더 자세히 파고들면 된다.
둘, 가르쳐라.
배우고 싶은가? 알고 싶은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설명하다 보면 갑자기 턱 막힌다. 바로 그 지점이 당신이 뚫어야 하는 지점이다. 가르칠 사람이 없다면 블로그에라도 써라. 정말 알고 있는지,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너무 기초적인 내용이라 공개적으로 쓰기 쪽팔리는가? 누가 보고 악플이라도 달까봐 두려운가?
셋, 쪽팔림을 버려라.
잊지 마라. 사람들은 당신의 블로그에 관심이 없다. 내가 공부를 하는게 중요하지, 남들이 뭐라든 마이웨이를 외쳐라. "기초도 없는 내가 무슨 깜냥으로 누구를 가르친다는거야?"라는 생각이 드는가? 이 생각을 버려야 공부할 수 있다. 혹시 누가 '뭐 이딴 걸 공부라고 하고 앉아있냐'라고 꼽을 준다면, 불쌍히 여겨라. 세상에 병신은 많다. 그들을 스승으로 삼지 말고, 소통이 되는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라.
넷, 같이 해라.
그래서 공부는 같이 해야 한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잘 아는 사람이랑 하는 것이 좋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해주고, 좋은 자료를 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 공부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좋은 공부 자료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사람마다 좋은 자료가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스승으로 삼을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면 뜻이 맞는 사람과 같이 해도 좋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같은 개념을 각자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공유해보면 자신의 사고가 풍성해짐을 느낄 수 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르는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파고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모르는 것에 대해 서로의 이해를 설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전구에 불이 켜진다. 그 순간의 희열을 만끽하라. 수학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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