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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책에는 많은 정리(theorem)들이 나온다. 이 정리를 대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정리의 증명을 한 줄 한 줄 따라가면서 왜 그 정리가 참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정리가 참임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왜 그 정리가 참일 “수밖에” 없는지 자기만의 구조와 직관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어쨌든 책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그 정리를 참으로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두 방법 모두 이해의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획득의 과정과 결과물의 질감은 꽤 다르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많은 전공 수학 책이 정리-증명-정리-증명-(가끔 따름정리)-연습문제의 패턴이 반복되게 적혀 있으며, 상상은 독자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간혹 그러한 정형에서 벗어난 책도 있는데, 내가 아는 대표적인 예는 이인석 교수님의 ‘선형대수와 군’이다. 나는 후자를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오히려 상상의 방향을 정해버린다는 점에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한 방법이 다른 방법에 비해 절대 우위를 갖지는 못한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논증과 직관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수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이든 취향의 문제이든 말이다.
나의 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정리의 의미와 직관을 심각하게 고민해본 기억은 없다. 책에 있는 중요한 공식을 보면 대부분은 그냥 받아들였다. 종종 신기하거나 찜찜함이 느껴지면 증명을 봤다. 일단 공식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문제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연습한다. 학문을 한다기 보다 “기술”을 익히는 관점으로 대했던 것 같다. 어쩌면 교수님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초중고를 거치며 몸과 머리에 익숙해진 방식이 그것이었으니까.
과분하게도 교육자의 자리에 있게 되어보니,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이 좋은지 고민하게 된다. 내가 공부했던 대로 공식과 문제 풀이에 중점을 맞추는 “기술” 위주의 강의를 할 수도 있다. 사실 그것이 나에게도 쉬운 방법이다. 다만 그렇게 배운 것이 정말 전공자로서의 역량 강화에 의미있는 도움을 주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기말고사가 끝남과 동시에 휘발되어버리는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거 배워봤자 현업에서 쓰지도 않는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기술을 배웠는데 기술을 쓰지 않게 되면 당연히 잊혀지는 기술이 된다. “회사에 들어가면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는 말도 어쩌면 쓰지도 않을 기술만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무엇이 중요한가.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기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의 이면에 숨어 있는 지식과 정보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안타까운 점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공부 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대다수의 학생들은 사고의 문을 닫고 지식만을 흡수하려고 한다. 대학교 1학년이 아니라 고등학교 4학년처럼 공부한다. 먹은 것이 성장의 양분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배설되어 버려서야, 돈과 시간을 들여 학위를 딴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학생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렇게 키우는 시스템이 고착되어버린 사회 구조가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나로서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고백하건데, 사실 나 역시 지난 몇 년간의 강의를 되돌아보면 기술 교육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떳떳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구상 중이다. 몇 가지 생각해둔 것은 있으나 구체화가 부족하여 미루고 있다. 너무 늦기 전에 세상에 내놓고 싶다.
공식, 증명, 연습문제. 이미 다 책에 있는 것들이다. 앵무새마냥 책의 내용을 따라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생 입장에서 스스로 성장했음을 느끼려면, 뭐라도 남는 게 있으려면, 아주 작은 것부터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연습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 교수가 해줘봤자 학생 입장에서는 흡수해야 할 또 다른 지식일 뿐이다.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배움은 책을 덮고 머리 속에서 지식을 재구성할 때 창발한다. 공부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다. 모두가 이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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