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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수학을 읽어드립니다, 남호성

게으른 the lazy 2024. 1. 30. 12:25

 

2024년 4번째 책: 수학을 읽어드립니다, 남호성 지음, 한국경제신문, 2021.

한줄요약: 영문학도는 어떻게 인공지능 연구자가 되었는가 (aka 영어인)

아주 간혹 그런 책을 만난다. 처음 읽을 때에는 그냥 그저 그랬는데, 이상하게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 AngeloYeo님 채널에서 우연히 추천 영상을 보고 흥미가 생겨서 빌려봤다.(https://www.youtube.com/watch?v=V1I8HfBRHlI)

솔직히 초중반은 지극히 평범한 무용담 시리즈다. 이거다 싶으면 무모하게 도전하고, 아니다 싶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그만두고,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이겨내는,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헝그리 정신이 투철한, 
열정 가득한, 
진짜 인생 열심히 사는 분의 성공기.
꼰대들이 무기로 쓰기에 딱 좋다는 점이 이 책의 단점이라면 단점.

중후반이라고 딱히 새로울 얘기는 없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수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동의할 사람은 이 책이 아니었어도 동의할 것이고, 그렇지 않을 사람에게는 전혀 공감을 살 수 없을 만한 그런 이야기.

그런데... 묘하다. 이상하게 신경쓰이고 마음을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어쩌면 아래의 한 문장 때문이었을 수도.

『가장 감동적인 글은 가장 솔직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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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읽으면서 공감이 가거나 '나도 할 말 있소'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았다.
살을 취하느라 놓쳤던 진주를 발굴한다는 느낌으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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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더 이상 대학원 연구에만 목매고 있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아닌 건 아니라는 판단이 빨랐기에 그길로 공부를 중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만두기엔 너무 늦은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사실 가장 빠를 때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그만두는 것도 도전하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 용기가 없어서 대학원 생활을 그만두지 못했었다. 물론 돌이켜보면 그 용기가 없었던 덕분에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 그때 정말로 그만두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많이 다른 인생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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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임원 면접이 시작되었다. 서류에 통과한 지원자들은 나를 빼고 모두 공대 출신이었다. 면접에서 공통되는 질문을 받았는데, 공학적인 내용이라 솔직히 질문의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 솔직히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역제안을 했다. "면접관님, 저는 공학 전공이 아니라 질문조차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대신 석사과정 동안 제가 연구하고 공부했던 분야에 대해 설명을 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런 압박스러운 상황에서 오히려 에라 모르겠다 들이받는 똘끼도 대단하지만, 나는 반대 생각을 해봤다. 내가 면접관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물론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와 가능성만 보고 비전공자를 채용할, 다른 의견을 내는 면접관에게 들이받을 '똘끼'를 나는 가졌을까? 현실적으로는 도박에 가깝지 않은가? 아, 물론 20년도 더 전이라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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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의 1년 반의 시간이 지나가던 어느 날, 나는 잘 다니던 회사를 제 발로 걸어나왔다. (...) 언젠가는 학계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 가슴이 시키는 일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배부른 소리?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그걸 때려치워?" 하는 호통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해보고 싶은 일을 하고 죽자는 마음이 더 컸다.』

나는 2015년 삼성전자를 퇴사했다. 이후의 계획 따위는 없었다. 유학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이직할 곳이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연락을 주고받던 곳이 있지도 않았다.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김어준이 말했다. 결혼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혼의 이유는 딱 하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라고.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기계의 부품처럼 일하는 내 모습'이었다. 내 인생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 한 결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빨리 그만두었어야 했다. 난 항상 움직임이 느렸다. 참고 참다가 터질 때가 되어서야 행동했다. 그래도 대학원 때 취하지 못한 행동을 이 때는 취했다. 대학원 생활을 견딘 것, 회사를 견디지 않은 것, 모두 잘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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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지도 교수님께 왜 나를 선택했는지 물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자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호성, 넌 코딩을 잘하잖아! 해스킨스는 언어 연구소지만 다양한 학문과의 융합을 꾀하고 있고, 과학, 공학, 수학, 코딩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는데, 우리에게 프로그래머인 너는 천군만마와 같았어!"』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분은 국내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인류학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인류학 전공자가 본인 포함 한국인 2명 외에는 없었다. 문학, 정치, 경제 전공자들 틈에서 한참 우쭐해져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보고서를 본 지도교수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Great summary! So what's your opinion?" 본인은 인류학의 테두리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 타 전공 출신들은 인류학을 자신의 본 전공에 접목하여 다양하게 해석하고 창의적인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분도 거기에 자극을 받아 경영 컨설팅에 도전했다. 인류학을 접목한 컨설팅이 고객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자, 이제 컨설팅펌에서 인류학 출신들을 뽑기 시작했다. "경계를 오가는 연결자". 창의와 혁신은 완벽한 내부인도, 완벽한 외부인도 아닌, 소위 '양다리'를 잘 걸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이야기.

한 우물을 파지 말라는 글을 예전에 쓴 적이 있는데(https://alook.so/posts/Zktb8a3) 이 책의 필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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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주변의 평판을 쌓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던 터라 아직 인맥이나 인간적인 교류를 중요하기 여기는 학계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변수와 운의 교묘한 줄다기리에서 최종 승리를 해야 하니, 그저 유학 갈 때처럼 최선을 다해 서류를 준비하고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교수가 되는 것에는 운이 많이 작용한다. 수학의 즐거움 인터뷰에서도 말한 적이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P2Yzn7lp4fI) 나는 정말 운이 좋아서 교수가 된 케이스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나였는데 '교수'라는 직함이 붙자 갑자기 세상이 나에게 친절해지고 세상이 나를 어려워하는 것도 아직 어색하다. 좀 더 '쉬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아직 잘 안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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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로서 그저 학문을 가르치고 프로젝트를 따내고 논문 실적을 올리는 기존의 패턴을 따라갈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그때 혼자 결심한 바가 있다. (...) '교수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학생의 이로움을 추구한다.'』

언젠가 불쾌한 영상을 본 기억이 난다. '노트 쓰기로 당신의 천재성을 끌어내세요'라는 제목의 세바시 영상이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g-39OF50pUw) 10분 7초 쯤에 나오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 

"저런게 교수야? 연구도 못하는게 강의나 뻔질나게 하고." 

너무 불쾌했다. 강의보다 연구가 더 고귀한 행위라는 생각, 교수로서 갖는 우월감이 느껴졌다. 교수가 되면 우월감에 빠지기 쉽다. 세상이 나에게 잘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교수이지만 연구는 거의 못/안하고 있다. 부채의식은 있지만, 좋은 강의를 만들고 좋은 교육자료를 만드는 것이 더 재밌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손을 놓을 수는 없으니 연구를 하기는 해야겠지만... 앞으로도 이런 기조는 유지할 생각이다. 누군가 나에게 교수 직함을 떼라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들어줄 용의가 있다. 직함에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 직함이 아니라, 내가 한 일들로 평가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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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로 불리는 '선생'이 되던 첫 해인 2014년 스승의 날에 나 자신에게 썼던 편지다. (...) 첫째, 늘 배우는 학생의 신분이어야 한다. (...) 둘째, 나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떠먹여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걸 교실에서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무조건 떠먹이자. (...) 셋째,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감동은 반전에서 나온다. 예상을 빗나가게 해야 한다. 선생이면 이런 복장을, 선생이면 이론 언어를, 선생이면 이런 행동을,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깨부숴버려야 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역설적으로 선생답지 않으면 멋있는 선생이 될 수 있다. 넷째, 학생들에게 행복을 주어야 한다. 나를 어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나 때문에 힘든 건 절대 있어선 안 된다.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반드시 생각하자. (...) 마지막으로, 절대 잊지 말고 이 모든 것을 실천해야 정말 '멋있는' 선생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첫째, 나는 항상 뭐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너무 아쉬운 사람이다. 동의.

둘째, 정말 문자 그대로 '떠먹이는' 주입식을 말한다면 나는 반대. 하지만 다른 맥락으로 해석하여, '생각하는 방식을' 떠먹이는 거라면 부분적으로 찬성. 하지만 이것도 조심해야 한다. '생각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 때 사고는 확장된다. 

셋째, 이건 정말 누군가에게는 꼭 보여주고 싶다. 누군지는 비밀.

넷째, 반성한다. 학생들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지금까지는 완벽히 실패했다. 아직도 나를 너무 어려워한다. 간혹 내가 생각해도 심했나 싶을 정도로 매몰차질 때가 있는데, 주로 학생이 무성의하거나 문자 그대로 떠먹여주길 바라는 등 '성인'으로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이다. 아닌건 확실히 아니라고 선을 딱 긋는 편인데, 그것 때문인가 싶다. 이 선긋기도 좀 덜 차갑게 할 방법이 있으려나.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책을 쓰는 중이다. 언제 다 쓰려나.

마지막으로, 실천하자. 백번 동의. 프로 다짐러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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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것은 분명 이타적인 행위다. 하지만 나를 위한 최고의 학습은 누구를 가르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남긴 명언처럼, 어떤 지식은 아무나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 때 그 깊이가 가장 깊어진다. 결국 누군가에게 제대로 가르침으로써 자신의 지식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니, 이는 한편으론 이기적인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내가 부임하고 나서 처음 맡은 강의가 재료역학이었다. 이 기간 동안 재료역학을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학생 때보다 몇 배는 더. 가르치는 사람은 단순히 내용 전달자가 되면 안 된다. 그걸 넘어서 과목의 '철학'을 꿰뚫고 그걸 이해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 재료역학 강의 도중에 발생한 나의 사고 전환 과정은 얼룩소에 적은 적이 있다.(https://alook.so/posts/kZtLjaY) 그리고 그 전환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재료역학 책을 쓰고 있다.(https://wikidocs.net/book/10282) 무한대를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연구자에게 소개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Vp570S6Plt8) 어떤 개념에 대한 '구조'가 머리 속에 그려져 있지 않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이다. 

파인만 영상 중 유명한 것이 있는데, 그 영상에서 파인만은 자석의 동작 원리를 묻는 인터뷰어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계속 되묻는다.(https://www.youtube.com/watch?v=MO0r930Sn_8) 질문은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런 맥락이 없는 질문에는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다는 일종의 반항이자 어느 레벨이든 원하는 답을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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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 오랜 시간 이 명언과도 같은 속담은 절대 진리처럼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다. 속담이란 게 민족성을 뒷받침하기도, 이끌어가기도 하는 말이라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한 우물을 파는' 일에 매진해왔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제는 그 말이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물을 파려면 여러 우물을 파라."』

누군가 한 우물을 파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소수의 천재가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바꾸던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협력하고 융합하지 않는 개인이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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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는 모음은 이러한 성대에서 만들어진 사인 곡선들의 조합 소리를 '아'의 입 모양으로 다듬은 소리라고 했다. (...) 위의 성대에서의 사인 곡선들은 입 모양의 필터를 통해 아래에서 다듬어진 결과를 보여준다. (...) 기존의 사인 곡선이 사라지거나 새로운 사인 곡선이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성대 소리의 사인 곡선들의 진폭(강도)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어떤 사인 곡선은 강하게, 어떤 사인 곡선은 약하게 함으로써 '아' 모음도 '이' 모음도 만들 수 있다.』

진짜 좋은 내용인데 이 텍스트만으로는 비전공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악기 소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단일 주파수로는 피아노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기껏해야 80년대 게임 사운드 정도밖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남극탐험의 BGM을 떠올려보자.) 피아노 소리가 나오려면 배음의 조합이 필요하다. 예전에 냥캣을 매트랩으로 연주(?)한 적이 있는데(https://www.youtube.com/shorts/pw_zIUAfgV8) 실제 냥캣과 더 정확하게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떤 배음 조합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 이상은 진행하지 않았었다. 이 부분이 좀 더 자세히 설명되면 좋았겠지만 책이라는 매체의 특성, 분량 및 가격과의 절충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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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학 교육이 이렇게 된 이유는 수학 교육을 '수학자'가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자들은 말 그대로 수학을 하는 학자다. 하나의 문제를 내고 그것을 증명 등으로 풀어내는 연구와 역할을 하는 것이 그들의 지상 과제다. 그렇기에 수학이 어떻게 이용되는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초.중.고등학교 수학 교과서를 보면 모두 수학자를 양성하는 정규 과정의 일부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의무교육으로 수학자의 길을 밟아 가고 있는 셈이나 다름 없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해보는 의견이다. 나로서는 완전히 동의하기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말은 해야겠다. 주입식 교육이 문제다, 수학에서 행렬와 벡터와 미적분이 빠지는 것이 말이 되냐는 등의 한탄이 많지만, 나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다. 실제로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학생들은 그냥 기계처럼 문제를 풀 줄만 안다고 한다. 문제가 조금만 비틀리면 '배운 적 없는 것'이라며 포기한다고 한다. 시키는 것만 딱 딱 하고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상태로 성인이 된다. 그래서 수강 과목을 직접 선택하지 못해 누군가 정해주기만 기다리는 학생들이 생긴다. 그게 대학원으로 이어지면 지도교수가 시키는 것만 하는 학생이 되고, 직장으로 이어지면 사직서를 부모님이 제출하러 오는 인간이 된다. 

기계처럼 문제를 푸는 것은 이미 진짜 기계가 더 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올림피아드 문제를 푸는 인공지능이 푸는 시대가 왔는데 말이다.(http://m.dongascience.com/news.php?idx=63413)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문제를 푸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학생과 선생 모두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얼룩소에 '인공지능의 시대, 무엇을 배워야 할까'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https://alook.so/posts/w9tyqrP) 거기서 나는 수학, 프로그래밍, 철학을 말했었다. 중고등학교 수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으로서의 수학을, 파이썬이 아니라 프로그래머의 업무를 이해하기 위한 프로그래밍을, 세상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이동진 독서법에도 나오듯이, 삶에 필요한 것을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기계처럼 일하면 결국 언젠가 기계에게 대체된다.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칸트가 말했듯, 인류 공동체 전체가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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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효율이 높다고는 솔직히 말 못하겠다. 시간이 많이 든다는 얘기다. 여기까지 쓰는데 3시간 걸렸다. 그래도 좋으니까 한다. 주어진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만이다. 이게 독후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여기까지. 이제 일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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